한능검/한능검44회

한능검 44회 심화_6~10_정답 및 해설

bluecolor 2021. 1. 30.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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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아단성 전투 이후의 사실

정답> ②

'생각컨대 신라가 우리의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아서, [그곳의] 백성들이 가슴 아파하고 원망스러워하며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 이 없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군사를 주면 단번에 그 땅을 되찾겠다고 온달이 왕에게 아뢴 후 '마침내 온달이 출전하 여 신라군과 아단성 아래에서 전투를 하다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쓰러져 사망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배경지식이 필요한 문제 로, 온달(?~590)은 고구려의 제25대 왕인 평원왕 때(재위 559-590)과 제26대 왕인 영양왕 때(재위 590-618)의 사람이다. 영양왕 원년인 590년에 명장 온달이 영양왕에게 자청하여 신라 진흥왕에 의해 복속된 죽령(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 사이에 있는 고개) 이북의 땅을 회복하겠다며 자청하여 출전하였다가 아단성 (지금의 서울 아차성) 아래에서 전사하였다. 고구려의 연개소문(?~666)이 정권을 장악하고 신라를 압박한 것 은 642년 이후의 일이다(영류왕 25년인 642년에 정변을 일으켜 정권 장악).

오답 해설>

① 위(魏) 관구검의 공격으로 (고구려의) 환도성이 함락된 것은 동천왕 18년인 244년의 일이다. ③ 미천왕이 서안평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한 것은 재위 13년인 312년의 일이다. ④ 태조왕이 (동)옥저를 정복하고 동해안으로 진출한 것은 재위 4 년인 56년의 일이다. 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고 남진 정책을 본격화한 것은 재위 15년인 427년의 일이다.

 

7 – 백제 의자왕 대의 사실

정답> ②

'소정방(592~667)이 당의 내주에서 출발하니, 많은 배가 천 리에 이어져 물길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무 열왕이 태자 법민을 보내 덕물도에서 소정방을 맞이하였는데, 소 정방이 '나는 백제의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서 이 왕 의 도성을 격파하고자 한다'고 말한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백제를 공격하러 온 나당 연합군과 관련된 것으 로, 자료 속 '이 왕의 도성'에서 '이 왕'은 백제의 제31대 왕이자 마지막 왕인 의자왕(재위 641-660)임을 알 수 있다. 백제가 대야성을 점령한 것은 의자왕 2년인 642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백제가 사비[부여]로 천도한 것은 성왕 16년인 538년의 일이 다. ③ 고구려가 낙랑군을 축출한 것은 미천왕 14년인 313년의 일이 다. ④ 신라가 매소성에서 당군을 물리친 것은 문무왕 15년인 675년 의 일이다. ⑤ 신라가 안승(?~?)을 보덕국왕으로 임명한 것은 문무왕 14년인 674년의 일이다

 

8 – 발해(솔빈부)

정답> ④

'평양의 조선 중앙 역사 박물관으로부터 대여한 문화유산을 전 시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가)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 부에서 출토된 대형 치미는 고구려와의 문화적 연관성을 확인 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치미란 목조 건축물에서 용마루의 양 끝에 높게 부착하던 장식기와이다. '상 경 용천부'라는 낱말에서 제시된 자료는 발해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솔빈부는 발해의 지방 행정 구역 중 하나이다. 솔빈부의 특산물 인 말이 유명하였다.

오답 해설>

① 녹읍을 폐지한 것은 신라의 신문왕이다(689, 신문왕 9). ② 백강 전투가 있었던 것은 663년의 일이다. 나당 연합군과 (백 제를 구원하러 온) 왜군·백제 부흥군이 맞서 싸웠다. ③ 청해진(지금의 전남 완도)이 설치된 것은 신라 흥덕왕 3년인 828년의 일이다[~851(문성왕 13)까지 존속]. ⑤ 지방에 22담로가 설치된 것은 백제 무령왕 때(재위 501-523) 의 일이다

 

9 – 금관가야

정답> ④

'김구해가 아내와 세 아들, 즉 큰아들 노종, 둘째 아들 무덕, 셋 째 아들 무력과 함께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 복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법흥]왕이 예로써 그들을 우대하여 높은 관등을 주고 본국을 식읍으로 삼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에서 말하는 '나라'는 법흥왕이 재위 19년(532)에 병합한 김해의 금관가야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자료에 나오는 김구해는 김유신(595~673)의 증조부 이다. 시조 김수로왕의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나라는 금관가야이 다.

오답 해설>

① 만장일치제로 운영된 화백 회의가 있었던 나라는 신라이다. ②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진대법을 실시한 나라는 고구려이다 (194, 고국천왕 16). ③ 박, 석, 김의 3성이 번갈아 왕위를 차지한 나라는 신라이다(3 대 유리 이사금에서 16대 흘해 이사금까지). ⑤ 오경박사, 의박사, 역박사 등을 일본에 파견한 나라는 백제이 다.

 

10 – 신라 원성왕 대 이후의 사실

정답> ⑤

'혜공왕 말년에 반신(叛臣)들이 제멋대로 날뛰자 선덕[김양상]이 상대등으로 있으면서 임금 측근의 나쁜 무리를 제거하자고 부르 짖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김경신이 이에 참여하여 난을 평정하였고 선덕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상대등이 되었다'는 내용 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이후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일치하여 김 경신을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하니 국인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는 내용이 나와 있다. 신라 하대에는 진골 귀족 간에 왕위 쟁탈전이 심하게 일어나 정 치적 상황이 꽤 복잡하게 흘러간다. 따라서 배경지식이 좀 필요 한데, 자료에서 선덕[김양상]이 신라의 제37대 왕인 선덕왕(재위 780-785)이고, 그 다음 왕으로 즉위하는 김경신이 곧 제38대 왕, 원성왕(재위 785-798)이다.* *특징적인 것은 원성왕 이후 왕위에 오르는 18명의 왕들 중 박씨 출신 의 세 왕, 즉 신덕·경명·경애왕을 제외한 15명의 왕들이 모두 원성왕계 후손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때의 왕위 쟁탈전이라는 것은 사실 같은 혈족 집단 내부의 유력자를 중심으로 한 종족 혹은 거기서 더 세분된 가문 단위로 나뉘어 이뤄졌던 셈이다. 최치원(857~?)이 국왕(진성 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건의한 것 은 894년의 일이다(진성 여왕 8).

오답 해설>

① 진골 귀족인 김춘추(604~661)가 왕위에 오른 것은 654년의 일이다[태종 무열왕(재위 654-661)]. ② 왕의 장인인 김흠돌(?~681)이 반란을 도모한 것은 신문왕 원 년인 681년의 일이다. ③ 이차돈(506~527)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 떄의 일이다(527, 법흥왕 14). ④ 자장(590~658)의 건의로 황룡사 구층 목탑이 건립된 것은 선 덕 여왕 12년인 643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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