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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능검/한능검44회 10

한능검 44회 심화_46~50_정답 및 해설

46 – 일제 강점기 말의 사회 모습 정답> ③ 제1조에 '호적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연령 17년 이상 제국 신민 인 남자로서 육군 병역에 복무하기를 지원하는 자는 육군 대신이 정한 바에 따라 전형 후 이를 현역 또는 제1 보충 병역에 편입할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법령은 1938년 2월에 제정된 일제의 육군 특별 지원병령임을 알 수 있다. (경성) 부민관에서 폭탄이 터지는 의거가 발생한 것은 1945년 7 월의 일이다(부민관 투탄 의거). 당시 친일파의 거두 박춘금이 일 제 총독부 고관과 국내 친일파 다수를 모아놓고 연설을 하고 있 었다. 오답 해설> ① 신간회가 창립된 것은 1927년 2월의 일이다. ② 원산 총파업이 일어난 것은 1929년 1월의 일이다(~4월까지 진행)...

한능검 44회 심화_41~45_정답 및 해설

41 – 회사령 제정(허가제) 정답> ④ '토지 조사 사업이 진행되던 이 시기에 총독부가 조선에 대한 식민 통치를 미화하고, 그 실적을 선전하기 위해 개최한 조선 물산 공진회 회의장 전경을 그린 것'이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그림에는 경복궁 일부를 헐어내고 물산 공진회장으로 조 성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바 이는 일제가 조선의 정통 성과 존엄성을 훼손하려는 의도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조선 물산 공진회가 개최된 것은 1915년 9월이다(~10월까지 진행). 일제는 이 시기(1910년대)에 회사 설립 시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회사령을 적용하였다(1910.12, 허가제 회사령). 옳은 정책이 다. 참고로 허가제 회사령은 1920년 4월에 신고제(계출제) 회사 령으로 바뀌었다(일본 자본과..

한능검 44회 심화_36~40_정답 및 해설

36 – 군국기무처 정답> ① '초정부적인 정책 의결 기구였다'는 점, '총재 1명을 포함하여 20 명 내외로 구성되었다'는 점, '총재는 영의정 김홍집이 겸임하였 다'는 점, '약 3개월 동안 210여 건의 법안을 의결하였으나 6개 월여 만에 폐지되었다'는 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1894년 6월 교정청을 폐하고 대신 설립되어 이른바 제1차 갑오개혁을 이끈 기구인 군국기무처임을 알 수 있다. 제1차 갑오개혁 때 공사 노비법의 폐지를 결정하였다. 오답 해설> ② 임술 농민 봉기를 계기로 설치된 기구는 삼정이정청이다 (1862). 안핵사로 왔던 환재 박규수(1807~1876)가 요청하였다. ③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의 건의로 혁파된 기구는 도교 의식을 주관하던 소격서이다. ④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국정 최..

한능검 44회 심화_31~35_정답 및 해설

31 – 대한 제국 시기의 사실(지계) 정답> ④ 위에는 '대한 제국 인민으로 전답을 가진 자는 이 관계(官契)를 반드시 소유하되, 구계(舊契)는 무효로 하여 본 아문에 수납할 것 '이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아래에서는 '대한 제국 인민 외 에는 전답 소유주가 될 권리가 없으니, 외국인에게 명의를 빌려 주거나 사사로이 매매·저당·양도하는 자는 모두 최고형에 처하고 해당 전답은 원주인의 소유를 인정하여 일체 몰수할 것'이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사진 이미지 포함)는 대한 제국이 광무개혁(광무 양전 사업)을 추진하면서 발급한 토지 소유권 증명서인 지계(地契)임을 알 수 있다(1899~1904). 러시아가 용암포를 점령하고 조차를 요구한 것은 러일 전쟁 발발 전해인 1903년 7월..

한능검 44회 심화_26~30_정답 및 해설

26 – 서울의 문화유산(선농단) 정답> ⑤ 사직단과 종묘, 문묘, 동관왕묘, 선농단이 차례로 제시되어 있다. 국왕이 신농, 후직에게 풍년을 기원하던 곳은 선농단이다. 조선 태조 때부터 설치되었다. 오답 해설> ①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곳은 (사직단이 아니라) 종묘 이다. 사직단은 나라의 신과 곡식을 맡은 신에게 제사를 지낸 제 단이다. ② 촉의 장수인 관우를 제사지내는 사당은 (종묘가 아니라) 동관 왕묘[동묘]이다. ③ 흥선 대원군이 집권한 시기에 혁파된 곳은 47개소를 제외한 전국의 서원과 만동묘이다(각 1871/1865). 문묘(文廟)는 유교의 성인인 공자를 모시는 사당[묘우(廟宇)]이다. 중앙에는 성균관, 지 방에는 각 향교에 설치하였다. ④ 대성전과 명륜당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곳..

한능검 44회 심화_21~25_정답 및 해설

21 – 조선 인조 정답> ③ 왕 1년 3월 14일에 '광해를 폐하여 군으로 봉하다'는 내용이 나 와 있다. 이어 '이광정, 이귀, 김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는 내 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동년 3월 15년에 '영창 대군 등의 관봉(官封)을 회복하도록 명하고, 인목 대비의 의복을 바꿀 시일 을 정하도록 예조에 하교'하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 된 자료는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인조(재위 1623-1649)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조는 즉위 초 총융청과 수어청을 설치하여 도성을 방비하였다 (각 1624/1626). 오답 해설> ①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고 유향소를 폐지한 왕은 세조(재위 1455-1468)이다(1467, 세조 13). ② 문신의 재교육을 위한 초계..

한능검 44회 심화_16~20_정답 및 해설

16 – 고려 공민왕 대의 사실 정답> ① '고려의 이 왕과 그의 부인인 노국 대장 공주를 그린 초상으로, 현재 국립 고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왕'은 고려의 공민왕(재위 1351-1374) 임을 알 수 있다. 유인우, 이자춘 등이 쌍성총관부를 수복한 것은 공민왕 5년인 1356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② 나세, 심덕부 등이 진포에서 왜구를 격퇴한 것은 우왕 6년인 1380년에 일어난 진포 대첩(진포 해전)이다. 이때 최무선이 개발 한 화약과 화포가 큰 역할을 하였다(최무선도 지휘관으로로 참 전). ③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의 삼별초가 조직된 것은 고려 고종 19년인 1232년의 일이다(몽골의 제2차 침입 시). 무신 집권자인 최우(집권 1219-124..

한능검 44회 심화_11~15_정답 및 해설

11 – 후삼국 통일(후백제의 내분) 정답> ④ '완산주의 궁궐 안'이라는 명칭 하에 '왕이 넷째 왕자인 금강을 총애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첫째 왕자가 신하 신덕과 명순 의 권유를 받아들여 왕을 금산사에 유폐한 뒤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완산주의 궁궐', '금강'이라는 낱 말을 통해 제시된 자료의 상황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867~936)이 큰 아들인 신검에 의해 전북 김제의 금산사에 유폐되는 사건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935.3). 이 일이 있은 이듬해인 936년 9월 신검이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 군에 패배하였다(고려에 의한 후삼국 통일). 오답 해설> ① 신숭겸(?~927)이 공산 전투에서 전사한 것은 927년의 일이다 (고려 태조 10). ② 궁예(?~918..

한능검 44회 심화_6~10_정답 및 해설

6 – 아단성 전투 이후의 사실 정답> ② '생각컨대 신라가 우리의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아서, [그곳의] 백성들이 가슴 아파하고 원망스러워하며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 이 없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군사를 주면 단번에 그 땅을 되찾겠다고 온달이 왕에게 아뢴 후 '마침내 온달이 출전하 여 신라군과 아단성 아래에서 전투를 하다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쓰러져 사망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배경지식이 필요한 문제 로, 온달(?~590)은 고구려의 제25대 왕인 평원왕 때(재위 559-590)과 제26대 왕인 영양왕 때(재위 590-618)의 사람이다. 영양왕 원년인 590년에 명장 온달이 영양왕에게 자청하여 신라 진흥왕에 의해 복속된 죽령(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 사이에 있는 고개) 이북의 땅을 ..

한능검 44회 심화_1~5_정답 및 해설

1 - 구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 정답> ② '경기도 고양시 도내동 유적 발굴 현장 모습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유적에서는 약 4~7만 년 전에 제작된 주먹도끼, 찌르개, 돌날 등 (가) 시대의 도구들이 8,000여 점이나 출토되었 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에서 말하는 (가) 시대는 구석기 시대임을 알 수 있다. 구석기 사람들은 주로 동굴이나 강가의 막집에서 살았다. 오답 해설> ①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일반화된 것은 고려 시대의 일이다. 이때에 이르러 밭농사에서 2년 3작의 윤작법이 보급되었으며 남 부의 일부 지방에서는 논농사에서 모내기법(이앙법)도 행해졌다. ③ 반량전, 명도전 등의 화폐를 사용한 것은 초기 철기 시대의 일이다. ④ 지배층의 무덤으로 고인돌을 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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