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 임진왜란 때의 수군의 활약
정답> ①
'임진왜란 때 수군의 활약'이라는 제목하에 맨왼쪽의 말풍선에 ' 옥포에서 26척의 적선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옥포 해전이 있었던 것은 1592년(선조 25) 5월 7일의 일이 다(옥포는 지금의 경남 거제시 옥포동). 가운데 말풍선에는 '견내 량에 머물던 왜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 전술을 펼 쳐 물리쳤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진주 대첩, 행주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불리는 한산도 대첩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한산도는 경남 통영시 한산면에 있는 섬). 1592년 7 월 8일의 일이다. 맨오른쪽 말풍선에는 '10여 척의 배로 명랑에 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명랑 대첩을 가리키는 것으로 1597년(선조 30) 9월 16일의 일이다. 명랑은 전남 해남군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에 위치하는 해협이다(세칭 울돌목). 이상을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나)-(다)'가 된다.
22 – 조선 후기의 경제 모습
정답> ②
'사행(使行)이 책문을 출입할 때에는 만상과 송상 등이 은과 인삼 을 몰래 가지고 인부나 말 속에 섞여들어 물건을 팔아 이익을 꾀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되돌아올 때는 수레를 일부러 천천히 가게 하고 사신을 먼저 책문으로 나가게 하여 거리낄 것 이 없게 한 뒤에 저희 마음대로 매매하고 돌아오는데 이것을 책 문 후시라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조선 후기 대청 무역 중 하나인 책문 후시(사무역인 후시 무역 중 한 곳)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공무역(관무역)은 개시 무역]. 벽란도에서 송의 상인이 교역한 것은 고려 전기의 일이다(벽란도 는 고려의 국제 무역항).
오답 해설>
① 전기수가 장시에서 책을 읽어주었던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 다. ③ 중인이 시사(詩社)에서 시를 낭송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④ 공인이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납품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 다. ⑤ 덕대가 물주의 자금으로 광산을 경영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 이다.
23 – 대동법
정답> ⑤
왼쪽 말풍선에 '이 법은 공납의 폐단을 해결할 목적으로 경기도 와 강원도 지역에서 실시되고 있다면서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충 청도와 전라도에도 이 법을 확대 시행해야 한다'는 말이 나와 있 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그렇다면 충청도에 먼저 시행하'라 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법'은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에 처음 시행된 대동법임을 알 수 있다. 대동법은 이후 인 조 원년인 1623년에 강원도, 효종 2년인 1651년에 충청도, 효종 9년인 1658년에 전라도, 숙종 3년인 1677년에 경상도, 숙종 34 년인 1708년에 황해도에 시행되었다. 대동법이 전국에 걸쳐 시행 되기까지 100년여가 걸린 셈이다. 대동법에서는 특산물 대신 쌀, 베, 동전 등으로 납부하게 하였다 (1결당 쌀 12두).
오답 해설>
①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한 것은 호포법이다(1871, 고종 8). ② 1결당 쌀 4~6두로 납부액을 고정한 것은 영정법이다(1635, 인 조 13). ③ 비옥도에 따라 토지를 6등급으로 나눈 것은 공법의 전분6등법 이다(1444, 세종 26) ④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포를 징수한 것은 균역법이다(1750, 영조 26).
24 – 기사환국과 갑술환국
정답> ⑤
위의 자료에 '이항 등이, 지금 왕자의 명호를 원자(元子)*로 정하 는 것은 간사한 마음을 품은 자가 아니라면 다른 말이 없어야 마 땅하다며 송시열은 방자하게도 상소를 올려 민심을 어지럽혔으 니, 멀리 유배 보내소서라고 상소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 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장희빈(희빈 장씨)의 아들[후일 경종] 세 자 책봉 문제로 서인(노론과 소론)이 축출되고 남인이 집권한 기 사환국(1689, 숙종 15) 때의 일임을 알 수 있다(당시 송시열은 노 론의 영수). * 원자(元子) : 왕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임금의 맏아들 이어 아래의 자료에는 '임금이, 기사년 송시열의 상소는 한때의 실수였을 뿐 그가 어찌 다른 뜻을 가졌겠는가, 이제 그동안 잘못 된 일이 다 해결되었으니 특별히 그의 관직을 회복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라고 하교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 된 자료는 기사환국 때 송시열이 사사(賜死)된 후 4년 후에 일어 난 갑술환국(1694)으로 송시열의 관직이 회복되고 제사도 지낼 수 있게 된 일을 가라킨다(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권력을 장악하고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 되었다.
오답 해설>
① 자의 대비의 복상 문제로 예송이 전개된 것은 두 차례이다. 현종 즉위년인 1659년에 1차 예송(기해예송)이, 현종 15년인 1674년에 2차 예송(갑인예송)이 일어났다. ② 공신 책봉에 불만을 품고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인조 2 년인 1624년의 일이다. ③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인해 기축옥사가 발생한 것은 선조 22 년인 1589년의 일이다. ④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기 위해 (성균관 앞 반수교 옆에) 탕평비 가 건립된 것은 영조 18년인 1742년의 일이다.
25 – 나선 정벌
정답> ②
'이것은 (가)의 결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간 봉림 대군이 쓴 한글 편지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편지에는 척화론을 내세우 다 끌려와 함께 있던 김상헌에 대한 염려가 담겨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병자호란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1636, 인조 14). 나선 정벌에 조총 부대가 동원된 것은 두 차례로 조선 효종 5년 인 1654년(변급), 효종 9년인 1658년(신류)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국경 지역에 4군 6진이 개척된 것은 조선 세종 대의 일이다 (1433/1434). ③ 강홍립 부대가 사르후 전투*에 참전한 것은 조선 광해군 11년 인 1619년 3월의 일이다. * 사르후 전투 : 조·명 연합군이 후금[청]의 군대가 만주의 사르후에서 맞서 싸운 전투로 조·명 연합군이 대패하였다. 이후 명청 교체의 분수령 이 된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 ④ 정봉수와 이립이 용골산성에서 항전한 것은 정묘호란 때의 일 이다(1627, 인조 5). ⑤ (일본과) 제한된 무역을 허용한 기유약조가 체결된 것은 광해 군 원년인 1609년의 일이다.
'한능검 > 한능검49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능검 49회 심화 31~35_해설 및 정답 (0) | 2021.01.24 |
---|---|
한능검 49회 심화 26~30_해설 및 정답 (0) | 2021.01.24 |
한능검 49회 심화 16~20_해설 및 정답 (0) | 2021.01.24 |
한능검 49회 심화 11~15_해설 및 정답 (0) | 2021.01.24 |
한능검 49회 심화 6~10_해설 및 정답 (0) | 2021.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