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능검/한능검46회

한능검 46회 심화_11~15_정답 및 해설

bluecolor 2021. 1. 27.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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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고려의 후삼국 통일

정답> ③

(가) '견훤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창군(古昌郡)의 병산 아래 에 가서 태조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 다. 930년에 벌어졌던 고려와 후백제의 '고창(지금의 경북 안 동) 전투'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나) '태조는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공산(公山) 아래에서 견훤을 맞아서 크게 싸웠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태조의 장수 김락과 신숭겸이 죽고 태조는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는 내 용이 나오는 바 이를 통해 제시된 사건은 927년 공산(지금의 대구)에서 벌어졌던 '공산 전투'임을 알 수 있다. (다) '[태조가] 뜰에서 신라왕이 알현하는 예를 받으니 여러 신 하가 하례하는 함성으로 궁궐이 진동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 다. 이어 '신라국을 폐하여 경주라 하고, 그 지역을 [김부에게] 식읍으로 하사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사건은 신라의 제56대 왕이자 마지막 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의 고려 귀순으로 신라가 망한 일임을 알 수 있다 (935, 고려 태조 18). (라) '태조가 …… 일선군으로 진격하니 신검이 군사를 거느리고 막았다.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후백제의 장군들이 고려 군사의 형세가 매우 큰 것을 보 고,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 를 통해 제시된 사건은 고려와 후백제(신검의 군사)가 마지막 으로 맞붙은 일리천(지금의 경북 구미) 전투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936, 고려 태조 19). 이상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나)-(가)-(다)-(라)'가 된다.

 

12 – 고려 성종이 추진한 정책

정답> ①

'몇 해 전에 설치한 12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각 1명씩 파견하여 지방의 인재를 가르치고 깨우칠 수 있도록 하라'는 내 용이 나와 있다. 이어 '아울러 지방관들은 지역의 인재를 중앙 으로 천거하도록 하여 이것을 항구적인 법식으로 삼도록 하라' 는 내용이 나와 있다. 12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파견한 것 은 고려 성종 6년인 987년의 일이고, 지방관들에게 지역의 인 재를 중앙으로 천거하도록 한 것은 성종 11년인 992년의 일이 다. 성종은 재위 중에 이와 같은 조치를 자주 취하였다. 고려 성종은 지방 세력 통제를 위해 향리제를 정비하였다(983, 성종 2). 요컨대 호장, 부호장과 같은 향리 직제를 마련하였다.

오답 해설>

② 주전도감을 설치(1097, 숙종 2)하여 해동통보를 발행한 (1102, 숙종 7) 것은 고려 숙종 때(재위 1095-1105)의 일이 다. ③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실시한 것은 고려 광종 9 년인 958년의 일이다. ④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의 규범을 제시한 것은 고려 태조 19년인 936년의 일이다. ⑤ 국자감을 성균관으로 개칭하고 유학 교육을 강화한 것은 고 려 공민왕 16년인 1367년의 일이다.

 

13 – 고려의 대거란 정책(나성 축조)

정답> ②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 고, 고구려 땅은 우리 소유인데, 너희들이 침범해 왔다'라는 내 용이 나와 있다. 이어 '서희가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 려의 옛 땅이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 다. 만일 국경 문제를 논한다면, (가)의 동경(東京)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 속 '(가)'는 고려에 침입해온 '거란'임을 알 수 있다.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고려는 개경에 나성을 쌓았다. 강감찬의 제의로 시작되었으며 이가도가 공사 책임자였다. 1009년(목종 12)에서 1029년(현종 20)까지 21년 동안 공사가 진행되었다.

오답 해설>

① 별무반을 보내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축조한 것은 고 려 예종 2년인 1107년의 일이다. ③ (명의 철령위 설치 통보에 대항하여) 최영을 중심으로 요동 정벌을 추진한 것은 우왕 14년인 1388년의 일이다. ④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약과 화포를 제작한 것은 왜구의 침 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이 설치된 것 은 우왕 3년인 1377년이고, 1380년 진포 대첩에서 화포를 활 용하여 왜구를 크게 격파하였다. ⑤ (원[몽골]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 복한 것은 공민왕 5년인 1356년의 일이다.

 

14 – 보조국사 지눌(송광사)

정답> ④

'순천시 조계산에 자리한 송광사'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 중 하나 로, 16명의 국사를 배출하여 승보사찰(僧寶寺刹)로 불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쌍수와 돈오점수를 내세우며 결사 운동 을 펼친 곳이 바로 (전남 순천에 소재한) 송광사[수선사, 정혜 사 등으로도 불림]이다.

오답 해설>

① (보각국사)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은 경북 청도 운문 사이다(1281, 충렬왕 7). ② (화쟁국사)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저술한 곳은 경주 분황 사 등의 사찰로 추정된다(7세기 중·후반). ③ (대각국사) 의천이 신편제종교장총록을 편찬한 곳은 개경 흥왕사로 추정된다(1090년대) ⑤ (원묘국사) 요세가 법화 신앙을 바탕으로 백련 결사를 이끈 곳은 전남 강진의 만덕사[백련사]이다(13세기 전반)

 

15 – 황룡사 구층 목탑 소실(대몽 항쟁)

정답> ⑤

(가)에서 '최우가 왕에게 아뢰어 속히 대전(大殿)에서 내려와 서쪽 강화도로 행차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망설이고 결정하 지 못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최우가 집안의 재물을 강화도로 옮기니, 수도가 흉흉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최우 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일(강 화도 천도)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1232, 고종 19). (나)에서 '재추(宰樞)가 옛 수도로 다시 천도할 것을 회의하고 날짜를 정해 게시하였으나, 삼별초가 다른 마음을 품고 따르지 않으면서 함부로 부고(府庫)를 개방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 다. 조정의 개경 환도 결정에 반발하여 삼별초가 대몽 항쟁을 이어나간 일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1270, 원종 11). 참고로 여기서 '재추'란 중서문하성[재부]의 재신과 중추원의 추신[추밀]로 곧 정책상의 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2품 이상의 재상들을 뜻한다. 또 '부고'란 관청의 문서나 재물 등을 보관하는 곳집(창고)이다. 외적[몽골병]의 침입을 받아 황룡사 구층 목탑이 소실된 것은 몽골의 3차 침입 시인 1238년(고종 25)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인사 행정을 담당하던 정방이 폐지된 것은 고려 창왕 즉위 년인 1388년의 일이다. 충선왕과 충목왕, 공민왕 때 폐지되었다 가 다시 설치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정방이 무신 집권자인 최우에 의해 처음 설치된 것은 고려 고종 12년인 1225년의 일 이다. ② 만적이 개경에서 신분 해방을 도모한 것은 고려 신종 원년 인 1198년의 일이다. ③ 묘청이 중심이 되어 서경 천도를 주장한 것은 고려 인종 13 년인 1135년의 일이다. ④ 정중부 등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것은 고려 의종 24년인 1170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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