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능검/한능검50회

한능검 50회 심화 26~30_해설 및 답지

bluecolor 2021. 1. 17.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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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성균관
정답> ④
'그림으로 보는 조선 국왕의 일생'이라는 제목 아래 '이 그림은
효명 세자가 (가)에 입학하는 의식을 그린 『왕세자입학도첩』
중 「입학도」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효명 세자는 이
날 궁을 나와 (가)에 도착하여 먼저 대성전의 공자 신위에 술
을 올린 후, 명륜당에 가서 스승에게 교육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곧 조선의 최고 교육 기
관, 성균관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효명 세자(1809~1830)는
1812년(손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817년 3월 성균
관에 입학하였다. 또 1827년에 왕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나
청정 4년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효명 세자의 비가 이른바 '조
대비'로 더 많이 알려진 신정 왕후(1808~1890)이다.
성균관은 생원시나 진사시의 합격자에게 입학 자격을 부여하였
다.
오답 해설>
① 전문 강좌인 7재가 운영된 교육 기관은 고려의 국자감이다
(1109, 예종 4).
② 전국의 부·목·군·현에 하나씩 설립된 교육 기관은 조선의 향
교이다.
③ (그 규모와 지역에 따라) 중앙에서 교관인 교수나 훈도가
파견된 교육 기관 역시 향교이다.
⑤ 한어(漢語), 왜어(倭語), 여진어 등 외국어 교육을 담당한
조선의 교육 기관은 기술 교육 기관 중 하나인 사역원이다.

 

27 – 1차 수신사(김기수) 파견
정답> ①
(가)에는 '저들이 비록 왜인이라고는 하나 실은 양적(洋賊)입니
다. 화친이 한번 이루어지면 사학(邪學)의 서책과 천주의 초상
이 교역하는 속에 섞여 들어오게 되고, 조금 지나면 전도사와
신도가 전수하여 사학이 온 나라에 두루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유명한 면암 최익현(1833~1906)의 지
부복궐척화의소[병자지부<복궐>소(丙子持斧<伏闕>疏)]임을
알 수 있다(1876.1.24). 당시 최익현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 강
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 체결이 협의 중이라는 얘기를 듣고
[예전 임진왜란 직전에 지부상소를 올린 중봉 조헌(1544~1592
년)의 예를 따라] 도끼를 가지고 광화문 앞에 가 이같이 상소
하였다.
(나)에서는 '지금 조정에서는 어찌 백해무익한 일을 하여 러시

아가 없는 마음을 먹게 하고, 미국이 의도하지 않았던 일을 만
들어 오랑캐를 끌어들이려 하십니까? 저 황준헌이라는 자는 스
스로 중국에서 태어났다고 하면서도, 일본을 위해 말하고 예수
를 좋은 신이라 하며, 난적의 앞잡이가 되어 스스로 짐승과 같
은 무리가 되었습니다. 고금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
까'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역시 유명한 1881년(고종 18) 2월
의 영남만인소임을 알 수 있다(이만손, 강진규, 이만운 등이
중심).
창산 김기수(1832~?)가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것은 강화도
조약 체결 직후인 1876년 4월의 일이다(1차 수신사).
오답 해설>
②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한 것은 1885년(고종 22) 4
월의 일이다(~1887.2).
③ 평양 관민이 제너럴 셔먼호를 붙태운 것은 1866년(고종 3)
7월의 일이다.

④ 거중 조정 조항이 포함된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된 것
은 1882년(고종 19) 5월의 일이다. 여기서 거중 조정이란 국제
기구, 국가, 개인 따위의 제3자가 국제 분쟁을 일으킨 당사국
사이에 끼어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일을 말한다. 조미 수
호 통상 조약 제1조에 규정되었으며, 고종은 이후 이 조항에 기
대어 미국에게 일본의 국권 침탈 행위를 막아줄 것을 요청하기
도 하였다.
⑤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한 것은 1866
년(고종 3) 10월의 일이다.

 

28 – 조선 후기의 모습
정답> ④
'김상철이 말하기를, 도성 백성들의 생계는 점포를 벌여 놓고
사고파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 기강이 엄하지 않아서
어물과 약재 등 온갖 물건의 이익을 중간에서 독점하는 도고
(都庫)의 폐단이 한둘이 아닙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
대조(大朝)께서 여러 차례 엄하게 다스렸으나, 점차 해이해져
많은 물건의 가격이 폭등한 것은 오로지 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평시서(平市署)* 등에서 적발하여 강하게 다스렸다면 어찌 이
런 일이 있었겠습니까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도고의
폐단이 나타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 평시서(平市署) : 시전과 도량형 ·물가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한 관청
이다. 조선 개국 당시에는 경시서(京市署)라 하다가 1466년(세조 12)
에 평시서로 개칭되었다.
왜인들에게 3포[부산포, 염포(울산), 제포(진해)]를 개항한 것
은 세종 8년인 1426년의 일이다(3포 개항).
오답 해설>
① 서얼이 청요직 통청을 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결국 철
종 2년인 1851년에 신해허통이 이루어져 서얼들의 관직 진출을
제한하는 법적 규제는 철폐되었다.
② 한글 소설이 널리 유행한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③ 동국문헌비고가 간행된 것은 조선 영조 46년인 1770년의
일이다.
⑤ 장시에서 판소리가 행해졌던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29 – 흥선 대원군
정답> ①
'신(臣) 병창이 (가) 앞에 나아가 품의했더니, 이르기를 성묘
(聖廟) 동서무(東西廡)*에 배향된 제현 및 충절과 대의가 매우
빛나 영원토록 높이 받들기에 합당한 47곳의 서원 외에는 모두
향사(享祀)를 중단하고 사액을 철폐하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
와 있다. 이어 '지시를 받들어 이미 사액된 서원 중 앞으로 계
속 보존할 곳 47개를 별단에 써서 들인 바 계하(啓下)**하시면
각 도에 알리겠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
(가)'는 전국의 서원을 47곳을 제외하고 모두 철폐한 흥선 대원
군(1820~1898)임을 알 수 있다(1864, 고종 원년).
* 동서무(東西廡): 성균관이나 향교의 문묘(文廟)에서 유현(儒賢)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대성전 앞 동쪽과 서쪽에 세운 건물[행각]을 아
울러 이르는 말(즉 동쪽에 세운 건물이 동무, 서쪽에 세운 건물이 서
무).
** 계하(啓下): 국왕의 재가

흥선 대원군은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건립한 것은 1871
년(고종 8) 4월의 일이다. 비석 표면에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
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주문(主文)
을 큰 글자로 새기고, '戒我萬年子孫 丙寅作辛未立(우리들의 만
대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고
작은 글자로 새겼다.
오답 해설>
② 나선 정벌을 위하여 조총 부대를 파견한 것은 효종 5년인
1654년(변급)과 효종 9년인 1658년(신류)의 일이다.
③ 각 궁방과 중앙 관서의 공노비를 해방한 것은 순조 원년인
1801년의 일이다.
④ 도성을 방비하기 위하여 총융청을 설치한 것은 인조 2년인
1624년의 일이다.
⑤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하여 경국대전을 편찬한 것은 성종
16년인 1485년의 일이다.

 

30 – 갑신정변
정답> ⑤
'이것은 우정총국이 업무를 시작하면서 발행한 국내 최초의 우
표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당시 화폐 단위가 '문(文)'이
어서 문위 우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김옥균 등이 주도
한 (가)(으)로 우정총국이 폐쇄되면서 이 우표는 더이상 발행
되지 못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고종 21년인 1884년 12월에 발생한 갑신정변임을 알 수 있다.
갑신정변은 청·일 간 톈진 조약 체결의 계기가 되었다(1885.4).
참고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한성 조약이 체결되었다
(1885.1).
오답 해설>
① 건양이라는 연호를 제정한 것은 을미개혁 때의 일이다
(1895.8~1896.2).
② 단발령 시행에 반발하여 일어난 것은 을미 의병이다[단발령
이 시행된 것은 1895년 11월(음력)].
③ 개혁 추진 기구로 교정청이 설치된 것은 1894년(고종 31)
6월의 일이다.
④ 구본신참에 입각하여 추진된 개혁은 광무개혁이다
(1897~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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