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능검/한능검50회

한능검 50회 심화 16~20_해설 및 답지

bluecolor 2021. 1. 17.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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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고려의 대외 항쟁

정답>

()'양규가 이수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석령까지 추격하여 2,500여 명의 머리를 베고 사로잡혔던 남녀 1,000여 명을 되찾아 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무신 양규(?~1011)가 활약한 것은 거란의 제2차 침입 때의 일이다(1010, 고려 현종 원년). 때 별장 김숙흥(?~1011)과 함께 무로대, 이수, 석령, 여리참 등에서 기습하여 77승하고 백성 1만여 명을 구하였다. ()에는 '윤관 등이 여러 군사들에게 내성(內城)의 목재와 기와를 거두어 9성을 쌓게 하고, 변경 남쪽의 백성을 옮겨 와 살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윤관(?~1111)이 동북 9성을 쌓은 것은 1107(고려 예종 2)의 일이다.

()에는 '적군이 30일 동안 귀주성을 포위하고 온갖 방법으로 공격하였으나, 박서가 임기응변으로 대응하여 굳게 지켰다. 에 적군이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서북면 병마사) 박서가 귀주성을 지킨 것은 몽골의 제1차 침입 때 의 일이다(1231, 고려 고종 18)(귀주성 전투). 이상을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 된다.

 

17 고려 시대의 경제 상황

정답>

위의 자료에는 '토지의 비옥함과 척박함을 구분하여 문무백관에서 부병(府兵),. 한인(閑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과()에 해당하는 토지['전지']를 주고, 또 과에 따라 땔나무를 구할 땅 [, '시지']을 주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곧 고려 시대 때의 전시과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 아래의 자료에는 '도평의사사에서 방을 붙여 알리기를, 지금부터 은병 1개를 쌀로 환산하여 개경에서는 15~16, 지방에서18~19석의 비율로 하되, 경시서에서 그 해의 풍흉을 살펴 그 값을 정할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은병[]이 발행된 것은 고려 숙종 6년인 1101년의 일이다.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가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한 것은 고려 때의 일이다.

오답 해설>

모내기법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덕대가 광산을 전문적으로 경영한 것 역시 조선 후기의 일이다.

면화, 담배 등이 상품 작물로 재배된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어 전세를 거둔 것은 조선 전기의 일이다[전분6등법, 1444(조선 세종 26)].

 

18 선농단[종묘]

정답>

'답사 계획서'라는 제목 아래 주제로 '조선 왕의 자취를 찾아 길을 걷다'가 제시되어 있다. 이어 1일차로 '() 경복궁 () 종묘'2일차로 '() 남한산성 () 수원 화성', 3일차로 '() 영릉 신륵사'가 나와 있다.

국왕이 신농, 후직에게 풍년을 기원하던 의례를 행한 곳은 선농(先農壇)으로(조선 태조),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종묘는 조선 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이다..

오답 해설>

조선 건국 이후 한양으로 천도한 것은 태조 3년인 139410월의 일이다(경복궁).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신하여 청과 항전을 벌인 곳은 남한산성이다(1636, 인조 14).

장용영 외영이 창설된 곳은 수원 화성이다(1793, 정조 17). 장용영 내영은 도성을 중심으로, 장용영 외영은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것은 세종 25년인 1443년의 일이다. 주 영릉은 세종대왕릉이다. 여주 신륵사는 영릉의 원찰(願刹)* 이기도 하였다.

* 원찰(願刹) : 망자의 화상이나 위패를 모시고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사찰. 원당(願堂) 또는 비보(裨補)라 부르기도 한다.

 

19 명에 대한 조선의 정책

정답>

작품명 '의순관영조도'가 제시되어 있고, '이 나라 사신이 만력(신종)의 등극을 알리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있던 의순관에 도착하는 모습을 그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선의 관리들이 예를 갖추어 의순관 앞에서 사신 일행을 맞이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만력제(신종)은 중국 명()13대 황제(재위 1572-1620), 이를 통해 제시된 '이 나라' 는 명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의주는 중국에 대한 외교 활동의 요지였으며, 떄문에 많은 그림과 시문이 산출되었다. '순관영조도'157210, 명의 사신을 조선의 관리들이 맞아들이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이다.

조선은 건국 초인 태조 때 삼봉 정도전(1342~1398)을 중심으(명에 대한) 요동 정벌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오답 해설>

광군을 조직하여 (거란의) 침입에 대비한 것은 고려 정조 때이다(947, 정조 2).

한성에 동평관을 두어 (왜의) 무역을 허용한 것은 조선 태종 때이다(1407, 태종 7).

(왜와) 기유약조를 체결하고 부산에 왜관을 설치한 것은 조선 광해군 원년인 1609년의 일이다.

포로 송환을 위하여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을 회답 겸쇄환사로 파견한 것은 조선 선조 37년인 1604년의 일이다. 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2~1616)를 만나 강화를 맺고 이듬해에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인 3,000여 명을 인솔하여 귀국하였다.

 

20 – 추사 김정희
정답> 
'이곳은 (가)이/가 제주도에 유배되어 머물럿던 장소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세한도를 그렸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추사 김정희(1786~1856)임을 알 수 있다. 세한도는 국보 제180호로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책을 보내준 제자 이상적(1804~1865)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그렸다고 전해진다 (1844, 헌종 10).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장무상망(長毋相忘)]는 인장을 통해 그림을 그린 추사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김정희는 (금석과안록에서)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처음으로 고증하였다(1852, 철종 3).
오답 해설>
① 100리 척을 사용하여 동국지도를 제작한 인물은 정상기(1678~1752)이다(1740년대).
② 무한 우주론을 주장한 의산문답을 집필한 인물은 담헌 홍대용(1731~1783)이다(1766, 영조 42).
③ 명에서 천리경, 자명종, 홍이포 등을 들여온 인물은 호정 정두원(1581~?)이다(1631, 인조 9). 명에 진주사로 갔다가 귀국 할 때 가져왔다. 마테오 리치의 천문서, 직방외기, 서양국풍속기등의 서적도 같이 가져왔다.
④ 침구술을 집대성하여 침구경험방을 저술한 인물은 허임 (1570~1647)이다(1644, 인조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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