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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국어 21학년도_16~20_정답 및 해설

bluecolor 2021. 2. 7.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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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1] 융합(인문+사회) - (가) ‘18세기 북학파의 북학론’ / (나) ‘18세기 후반 청의 사회·경제적 현실’

(가) 지문 해설 : 이 글은 18세기 북학파들 가운데 박제가와 이덕무의 북학론 형성 배 경과 견해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박제가는 18세기 청의 현실이 중화가 손상 없이 보 존된 것이자 조선의 발전 방향이라고 보고, 청 문물제도의 수용이 가져다주는 이익을 논하며 북학론의 당위성을 설파하였다. 이덕무는 박제가와 마찬가지로 물질적 삶을 중시하는 이용후생에 관심을 보였지만, ‘평등견’이라는 인식 태도를 바탕으로 청과 조 선의 현실적 차이뿐만 아니라 양쪽 모두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하지만 이덕무는 중화 의 중심이라 여겼던 명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주제] 박제가와 이덕무의 북학론 형성 배경과 견해 차이

 

(나) 지문 해설 : 이 글은 경제 발전이 정점에 달했던 18세기 후반 중국의 상황을 제 시하면서 당시 청의 번영이 19세기 들어 내외의 위기에 직면해 급속한 하락의 시대를 겪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18세기 후반 중국은 국내 교역이 활발했음은 물론 대외 무역이 발전하여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그러나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해 여 러 문제가 나타나면서 불법 활동과 반란의 기반이 된 결사 조직이 출현하고 정체된 관료 사회의 부정부패가 심화되었다. 이러한 위기의 씨앗들은 통치자들의 불안으로 이어져 서양과의 교역을 축소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주제] 18세기 후반 정점에 달한 청의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불안 요인

 

16. 글의 구조와 전개 방식

정답 해설 : (가)는 1778년 함께 연행길에 올라 함께 일정을 소화했던 박제가와 이덕 무의 연행록을 바탕으로 18세기 중국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제시한 글로, 1문단에서 개인적인 학문 성향과 관점에 따라 주목한 영역이 달라 18세기 북학파들의 북학론에 서도 차이가 나타난다고 언급하고 있다. 2문단에서는 청의 현실을 중화가 손상 없이 보존된 것이자 조선의 발전 방향이라고 보았던 박제가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 고 3문단에서는 청의 현실을 객관적 태도로 기록하고자 하면서 청에 대한 찬반의 이 분법에서 벗어나 청과 조선의 현실적 차이뿐만 아니라 양쪽 모두의 가치를 인정하였 던 이덕무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가)는 18세기 중국에 대한 북학파 학자들 의 견해를 제시하면서 그러한 견해의 형성 배경 및 견해 간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고 할 수 있다. 정답 ①

 

[오답 피하기] ② (가)는 청의 문물제도를 수용하자는 18세기 북학론 중 박제가와 이 덕무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을 뿐, 각 관점이 지닌 역사적 의의와 한계를 서로 비교하 고 있지는 않다. ③ (나)는 명대 이래의 경제 발전이 정점에 달했던 18세기 후반의 중 국의 사회상을 제시하고 있을 뿐, 다양한 사회상을 시대별 기준에 따라 분류하여 서 술하고 있지는 않다. ④ (나)는 18세기 후반 중국의 경제 발전 양상을 다루고 있을 뿐, 18세기 중국의 사상적 변화를 제시하거나 그러한 변화가 지니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분석하고 있지는 않다. ⑤ (가)는 18세기 후반 중국을 다녀온 박제가와 이덕무의 북학론을, (나)는 18세기 후반의 중국의 현실을 제시하고 있을 뿐, (가)와 (나) 모두 중국의 현실이 당시 조선이나 다른 나라에 미친 영향을 예를 들어 설명하 고 있지는 않다.

 

17. 세부 내용 파악 

정답 해설 : (가)의 3문단에서 이덕무는 청 문물의 효용을 도외시하지 않고 박제가와 마찬가지로 물질적 삶을 중시하는 이용후생에 관심을 보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 만 그는 중국인들의 외양이 만주족처럼 변화된 것을 보고 비통한 감정을 토로하며 중 화의 중심이라 여겼던 명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청이 중화를 보존하고 있음을 인정하였다고 볼 수 없다. 정답 ④

 

[오답 피하기] ① (가)의 2문단에서 박제가는 당시 청의 현실은 중화가 손상 없이 보 존된 것이자 조선의 발전 방향이라고 인식하였으며, 당시 조선은 나름의 독자성을 유 지하기보다 중화와 합치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청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고 보았다고 할 수 있다. ② (가)의 2문단에서 박제가는 자신이 인식한 청의 현실을 단순한 현실이 아니라 조선이 지향할 가치 기준으로 받아들였다 고 언급하고 있다. ③ (가)의 3문단에서 이덕무는 잘 정비된 마을의 모습을 기술하며 황제의 행차에 대비하여 이루어진 일련의 조치가 민생과 무관하다고 지적하였다고 언 급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청의 현실을 관찰하면서도 이면에 있는 민생의 문제를 간 과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⑤ (가)의 2문단에서 박제가는 당시 청의 현실을 중화가 손상 없이 보존된 것이자 조선의 발전 방향으로 보았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가)의 3 문단에서 이덕무는 중화의 중심이라 여겼던 명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박제가와 이덕무는 모두 중화 관념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18. 생략된 내용 추론

정답 해설 : (가)의 3문단에서 이덕무는 ‘평등견’이라 불렀던 인식 태도를 바탕으로 당시 청에 대한 찬반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청과 조선의 현실적 차이뿐만 아니라 양쪽 모두의 가치를 인정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아울러 이런 시각에서 그는 청과 조선은 구분되지만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고 보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평등견은 청 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지양하고 청과 구분되는 조선의 독자성을 유지하자는 인식 태 도라고 볼 수 있다. 정답 ⑤

 

[오답 피하기] ① (가)의 3문단에서 이덕무는 청 문물의 효용을 도외시하지 않고 물질 적 삶을 중시하는 이용후생에 관심을 보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평등견의 시각에서 청을 배우는 것과 조선 사람이 조선 풍토에 맞게 살아가는 것은 서로 모순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평등견을 조선의 풍토를 기준으로 삼아 청 의 제도를 개선하자는 인식 태도라고 볼 수 없다. ② (가)의 3문단에서 이덕무는 평등 견이라는 인식 태도를 바탕으로 당시 청에 대한 찬반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청과 조선 의 현실적 차이뿐만 아니라 양쪽 모두의 가치를 인정하였으며, 청과 조선은 구분되지 만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고 보았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평등견을 조선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청의 방식에 따라 개혁해야 한다는 인식 태도라고 볼 수 없다. ③ (가)의 3문단에서 이덕무는 청을 배우는 것과 조선 사람이 조선 풍토에 맞게 살아가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보았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평등견을 풍토로 인한 청과 조선의 차이를 해소하려는 인식 태도라고 볼 수 없다. ④ (가)의 3문단에서 이덕무는 평등견의 시각에서 청을 배우는 것과 조선 사람이 조선 풍토에 맞게 살아가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보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중국인들의 외양이 만 주족처럼 변화된 것을 보고 비통한 감정을 토로하며 중화의 중심이라 여겼던 명에 대 한 의리를 중시하는 등 자신이 제시한 인식 태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 다는 내용을 고려할 때, 중국인의 외양이 변화된 모습을 명에 대한 의리 문제와 관련 지어 파악하는 것은 평등견의 인식 태도에서 벗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19. 내용의 인과관계 파악

정답 해설 : (나)의 1문단에서 18세기 후반의 중국은 명대 이래의 경제 발전이 정점 에 달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2문단에서는 19세기에 접어들 무렵부터는 청이 심각한 내외의 위기에 직면해 급속한 하락의 시대를 겪게 되었으며 18세기 후반에도 이미 그 위기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의 징후들은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한 것으로, 인구 증가로 이주 및 도시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전 통적인 사회적 유대가 약화되거나 단절되자 사람들이 상호 부조 관계를 맺는 결사 조 직이 나타났는데 이런 결사 조직들이 불법적인 활동으로 연결되곤 했고 위기 상황에 서는 반란의 조직적 기반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인맥에 기초한 관료 사 회의 부정부패가 심화된 것 역시 인구 증가와 무관하지 않은 일로서 ‘위기의 씨앗’이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은 반란의 위험성 증가 등 인구 증가로 인한 문제 점들이 나타나는 여러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답 ③

 

[오답 피하기] ① (나)의 2문단에서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한 여러 문제는 새로운 작 물 재배, 개간, 이주, 농경 집약화 등의 민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았다고 언급하였으므로 ㉠은 새로운 작물의 보급 증가가 경제적 번영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② (나)의 1문단에서 상인 조직의 발전과 신용 기관의 확대는 교역의 질과 양이 급변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고 언급하였는데, 이는 18세기 후반의 중국의 경제 발전이 정점에 달해 있었다고 말한 근거에 해당하므로 ㉠은 신용 기관이 확대되고 교역의 질과 양이 급변하고 있는 상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④ (나)의 2문단에서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한 여러 문제는 새로운 작물 재배, 개간, 이주, 농경 집약화 등의 민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았다고 언급하였으므로 ㉠은 조정 에서 추진한 정책들이 실패한 상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⑤ (나)의 2문단에 따르 면 인구 증가로 이주 및 도시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전통적인 사회적 유대가 약화되거 나 단절되자 사람들이 상호 부조 관계를 맺는 결사 조직이 나타나고, 이런 결사 조직 들이 불법적인 활동으로 연결되고, 위기 상황에서는 반란의 조직적 기반이 되었던 것 을 ‘위기의 씨앗’으로 볼 수 있다. 인맥에 기초한 관료 사회의 부정부패가 심화된 것 은 인구 증가와 무관하지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유대의 약화로 인해 발생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은 사회적 유대의 약화로 인하여 관료 사회의 부정부패가 심 화되는 상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20. 글에 드러난 관점, 내용 비판

정답 해설 : (나)에서 대외 무역의 발전과 은의 유입은 중국의 경제적 번영에 영향을 미친 외부적 요인이었으며, 이를 통해 가능해진 은을 매개로 한 과세는 상품 경제의 발전을 자극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보기>의 ‘은이란 천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 물건이지만, 약은 사람에게 먹여 반나절이면 사라져 버리고 비단은 시신을 감싸서 묻 으면 반년 만에 썩어 없어진다.’라는 내용은 중국의 경제적 번영에 기여한 은의 효용 성을 높이 평가하면서 은의 효용성을 간과하고 있는 당시 조선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본 박제가의 견해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나)에 제시된 중국의 경제적 번영에 은이 기여한 요소를 고려할 때, <보기>에 제시된 은에 대한 평가는 은의 효용 적 측면을 높이 사는 평가라 볼 수 있다. 정답 ④

 

[오답 피하기] ① (가)의 [A]에서 박제가는 이익 추구를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으로 긍정하고 양반도 이익을 추구하자는 등 실용적인 입장을 보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보기>의 ‘중국 사람은 가난하면 장사를 한다. 그렇더라도 정말 사람만 현명하면 원 래 가진 풍류와 명망은 그대로다.’라는 내용은 [A]에서 제시한 실용적인 입장에 부합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② (가)의 [A]에서 박제가는 청 문물제도의 수용이 가져다주 는 이익을 논하며 북학론의 당위성을 설파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보기>의 ‘우리나 라에서는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많이 나는 산물을 다른 데서 산출되는 필요한 물건과 교환하여 풍족하게 살려는 백성이 많으나 힘이 미치지 못한다.’라는 내용은 [A]에서 제시한 북학론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라 볼 수 있다. ③ (나)의 1문단에서 18세 기 후반의 중국에서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접근할 수 있는 향촌의 정기 시장부터 인구 100만의 대도시의 시장에 이르는 여러 단계의 시장들이 그물처럼 연결되어 국내 교 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보기>의 ‘유생이 거리낌 없이 서점을 출입하고, 재상조차도 직접 융복사 앞 시장에 가서 골동품을 산다.’라는 내용 은 상업이 융성하고 관련 활동이 활발했던 중국 국내 교역의 양상과 상충되지 않는 다. ⑤ (나)의 2문단에서 인맥에 기초한 관료 사회의 부정부패가 심화된 것이 인구 증 가와 무관하지 않으며, 관료 조직의 규모가 정체되고 경쟁이 심화되어 종종 관료들이 불법적인 행위를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보기>의 ‘재상조차도 직접 융복사 앞 시 장에 가서 골동품을 산다.’라는 내용은 (나)에서 제시된 바 없는 관료, 지배층의 다른 면모이므로 당시 청의 지배층의 전체 면모가 드러나지 않는 진술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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