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능검/한능검48회

한능검 48회 6~10_심화_정답 및 해설

bluecolor 2021. 1. 25.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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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 신라 신문왕 대의 사실

정답> ③

재위 1년(원년, 681)에 '김흠돌 등이 반란을 도모하다 죽임을 당 하다'는 사실이 나와 있다. 재위 2년(682)에는 '국학을 세'웠고, 재위 5년(685)에는 '서원소경을 설치'하였다(전국을 9주 5소경으 로 조직). 마지막으로 재위 9년(689)에는 '달구벌로 천도하려 한' 사실이 제시되어 있다. 달구벌은 지금의 대구로, 이상의 자료를 통해 제시된 '(가)'는 신라의 제31대 왕인 신문왕(재위 681-692) 임을 알 수 있다. 신문왕은 재위 7년인 687년에 관료전을 지급하였고, 재위 9년인 689년에는 녹읍을 폐지하였다.

오답 해설>

①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을 복속한 것은 신라 지증왕 13년인 512년의 일이다. ② 화랑도를 국가 조직으로 개편한 것은 신라 진흥왕 37년인 576년의 일이다. ④ 최고 지배자의 칭호를 마립간으로 한 것은 신라의 제17대 왕 인 내물 때(재위 356-402)부터의 일이다(『삼국유사』). 참고로 『삼 국사기』에 따르면 제19대 왕인 눌지 때(재위 417-458)부터 마립 간이라는 칭호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⑤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된 것은 신라 법흥왕 14 년인 527년의 일이다.

 

07 – 원종과 애노의 난

정답> ②

왼쪽 말풍선에는 '이 탑은 진성 여왕 때 해인사 부근에서 있었던 전란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려고 세웠다'는 내용이 나 와 있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최치원이 작성한 탑지(塔誌)를 보면 혼란스러웠던 이 시기 상황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배경지식이 필요한 문제로, 제시된 사진 속 탑은 경남 합천군 가 야산에 있는 '해인사 길상탑'이다. 1965년 탑의 내부에서 157개 의 소탑(小塔)과 최치원(857~?)이 지은 4장의 탑지석(塔誌石)이 발견되었는데[최치원의 '해인사 묘길상탑기(海印寺妙吉祥塔記)'], 여기에 진성 여왕(재위 887-897) 9년인 895년에 발생한 초적(草 賊)의 약탈과 전란에서 불교 사원을 지키다 희생된 승려들의 원 혼을 추모하기 위해 삼층 석탑(길상탑)을 세웠다는 내용이 기록되 어 있다. (사벌주에서) 원종과 애노의 난 등 (신라 전국 곳곳에서) 농민 봉 기가 일어난 것은 신라 말의 일이다(889, 진성 여왕 3).

오답 해설>

① 빈민 구제를 위해 의창이 설치된 것은 고려 성종 5년인 986 년의 일이다. ③ 복신과 도침이 주류성에서 군사를 일으킨 것은 661년의 일이 다(661.9). ④ 묘청 등이 중심이 되어 서경 천도를 주장한 것은 1135년(고려 인조 13)의 일이다. 참고로 이때는 서경 천도 운동이 일어난 때 이며 서경 천도론은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넓게 보면 서 경 천도론은 고려 태조 때부터 거의 모든 고려 왕들이 신봉하였 던 풍수론인 '지덕쇠왕설(地德衰旺說)'*에 바탕을 두고 있다. * 지덕쇠왕설: 지덕이 쇠퇴한 곳에서 왕성한 곳으로 도읍을 옮겨야만 왕실과 국가가 융성해진다는 설 ⑤ 부처의 힘을 빌려 외침을 막고자 팔만대장경이 조판된 것은 1236년(고종 23)에서 1251년(고종 38)까지이다.

 

08 – 발해

정답> ①

'이것은 일본 나라현 헤이조큐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이라는 내용 이 나와 있다. 이어 '목간에 보이는 고려라는 명칭을 통해 일본은 이 국가를 고려, 즉 고구려를 계승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목간에는 '고려에 보낸 사절이 귀국하였으니, 천평보자 2년(758) 10월 28일 위계를 두 단계 올 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국가'는 발해임 을 알 수 있다. 758년은 발해 문왕 22년에 해당한다. 발해는 중정대를 두어 관리를 감찰하였다(중정대-감찰 기구).

오답 해설>

②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국가는 신라이다(536, 신 라 법흥왕 23). ③ 군사 조직을 9서당 10정으로 편성한 국가 역시 (통일) 신라이 다.(685, 신라 신문왕 5). ④ 골품에 따라 관직 승진에 제한을 둔 국가 역시 신라이다(신라 법흥왕 대 골품제 정비). ⑤ 상수리 제도를 시행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한 국가 역시 신라 이다(5세기 이전부터 실시 추정).

 

09 – 경주의 문화유산

정답> ②

'답사 계획서'라는 제목하에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가 답사 주 제로 나와 있다. 경로는 '천마총 → 첨성대 → 동궁과 월지 → 분 황사지 → 불국사'가 제시되어 있다. 자장(590~658)의 건의로 건립된 것은 첨성대가 아니라 황룡사 9 층 목탑이다(643, 선덕 여왕 12).

오답 해설>

① 천마도가 수습된 곳은 천마총 내부이다. 옳은 설명이다. 1973 년 고분의 동쪽 중앙에서 2장의 장니[말다래] 천마도가 발견되었 다. ③ (참)나무로 만든 14면체 주사위가 출토된 곳은 동궁과 월지(東 宮과 月池)이다. 옳은 설명이다. 1975년 동궁과 월지 바닥에서 발견하였다. 14면체 주사위 주령구, 한자어로 '목제주령구(木製酒 令具)'라고 한다. ④ 분황사지에는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탑이 남 아 있다. 옳은 설명이다. 즉, 분황사지 모전 석탑이다(634, 선덕 여왕 3). ⑤ 불국사 경내의 삼층 석탑(석가탑)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옳은 설명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1966년 탑 2층 탑신부에서 사리함과 함께 발견되었다.

 

10 – 후삼국의 통일(경순왕 김부의 귀부)

정답> ②

(가)에는 '태조는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공산(公山) 아래에서 견훤을 맞아서 크게 싸웠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태조의 장수 김락과 신숭겸은 죽고 모든 군사가 패배했으며, 태조는 겨 우 죽음을 면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 의 왕건이 맞춰 싸운 공산 전투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927.11). 공산은 지금의 대구 팔공산 일대이다. (나)에는 '[태조를] 신검의 군대가 막아서자 일리천(一利川)을 사 이에 두고 대치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태조가 견훤과 함께 병사들을 사열한 후 ······ 신검이 양검, 용검 및 문무 관료 들과 함께 항복하여 오니, 태조가 그를 위로하였다'는 내용이 나 와 있다. 936년 9월에 있었던 일리천 전투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리천은 지금의 경북 구미 선산에 있는 하천이며, 고려 왕건은 일리천 전투를 승리로 이끔으로써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 하였다. 경순왕 김부가 경주의 사심관이 된 것은 왕건에게 귀부한 직후의 일이다(935.11). 왕건은 항복해온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 고 그 지방의 자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오답 해설>

① 최승로(927~989)가 시무 28조를 건의한 것은 고려 성종 원년 인 982년의 일이다. ③ 대공(大恭)이 난이 일어난 것은 신라 혜공왕 4년인 768년의 일이다(『삼국사기』). 대공의 난이란 일길찬(一吉飡)의 관등에 있던 대공(?~768)과 그의 아우 아찬(阿飡) 대렴이 무리를 모아 일으킨 난이다. 이를 시작으로 96각간(角干)이 왕궁파(친왕파)와 김대공 파(반왕파)로 나뉘어 왕권을 놓고 싸운 이른바 '96각간의 난'이 이어졌다. 참고로 각간(角干)은 본래 신라의 최고 관등인 이벌찬 (伊伐飡)을 지칭하는 용어이므로 96각간은 각간의 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이 난을 일으킨 귀족과 진압한 귀족 전체를 포 함하여 일컫는 말이다. ④ 궁예(?~918)가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바꾼 것은 911년의 일이다. ⑤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가 시행된 것은 고려 광 종 9년인 958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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