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능검/한능검48회

한능검 48회 21~25_심화_정답 및 해설

bluecolor 2021. 1. 25.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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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사화

정답> ③

(가)에서 '갑자년 봄에, 임금은 어머니가 비명에 죽은 것을 분하 게 여겨 그 당시 논의에 참여하고 명을 수행한 신하를 모두 대역 죄로 추죄(追罪)하여 팔촌까지 연좌시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연산군 10년인 1504년에 일어난 갑자사화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사사 사건). (나)에는 '정문형, 한치례 등이 의논하기를, 지금 김종직의 조의제 문을 보니, 차마 읽을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 마땅히 대역 의 죄로 논단하고 부관참시해서 그 죄를 분명히 밝혀 신하들과 백성들의 분을 씻는 것이 사리에 맞는 일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 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연산군 4년인 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에는 '정유년 이후부터 조정 대신들 사이에는 대윤이니 소윤 이니 하는 말들이 있었다. ······ 자전(慈殿)은 밀지를 윤원형에게 내렸다. 이에 이기, 임백령 등이 고변하여 큰 화를 만들어 냈다' 는 내용이 나와 있다. 명종 원년인 1545년에 발생한 을사사화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라)에는 '언문으로 쓴 밀지에 이르기를, 조광조가 현량과를 설치 하자고 청한 것도 처음에는 인재를 얻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더니 ······ 경들은 먼저 그를 없앤 뒤에 보고하라고 한' 내용이 나와 있다. 중종 14년인 1519년에 발생한 기묘사화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이상을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나)-(가)-(라)-(다)'가 된다.

 

22 – 병자호란

정답> ③

왼쪽 말풍선에는 '소현 세자께서 돌아가셨는데 시신이 검은빛이 었고 이목구비에서 모두 피가 흘러 나왔다'는 내용이 나와 있 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이 전쟁에 패하여 청에 인질로 갔다가 8년 만에 돌아오실 때도 건강하셨던 세자께서 어찌 두 달 만에 그리되셨는가'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인조의 맏아들이었던 소 현 세자(1623~1649)가 청에 인질로 가게 된 것은 병자호란 때 문이었다[1636.12(인조 14)~1637.1(인조 15)]. 당시 전라도 병마절도사였던 김준룡(1586~1642)이 근왕병을 이끌 고 적에게 포위당한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던 중 용인 광교산에서 항전한 것은 병자호란 때의 일이다. 이때 김준룡은 청의 장수 공 경(孔耿)의 부대와 싸워 청 태조의 사위 백양고라(白羊高羅)를 포 함한 많은 적을 사살하였다.

오답 해설>

① 이괄의 반란 세력이 도성을 장악한 것은 인조 2년인 1624년 의 일이다. ② 곽재우, 고경명 등이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은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1592, 선조 25). ④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여 임시 기구로 비변사가 처음 설치된 것은 중종 5년인 1510년의 일이다(3포 왜란). ⑤ 포수·사수·살수의 삼수병으로 편제된 훈련도감이 신설된 것은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의 일이다.

 

23 – 진주 농민 봉기

정답> ③

2월 7일에 '수곡 도회(都會) 주모자 유계춘을 병영에 감금'한 내 용이 나와 있다. 이어 2월 14일에는 '덕천 장시 등에서 농민 시 위 전개'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2월 19일에 '우병사 백낙신이 시위를 해산하려 하자 성난 농민들이 그를 포위하여 감 금'한 내용이 나와 있다. '유계춘'과 '백낙식'이라는 이름(덧붙여 사족 이명윤 포함)과 '수곡'과 덕천'이라는 지명이 제시된 것으로 보아 자료 속 '사건'은 조선 철종 13년인 1862년에 발생한 진주 농민 봉기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상황 수습을 위해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환재 박규수 (1807~1876)가 안핵사로 파견되고, 삼정이정청이 임시로 설치되 었다.

오답 해설>

① 남접과 북접이 연합하여 전개된 사건은 동학 농민 운동이다 (제2차 봉기, 1894.9). ② 정부와 약조를 맺고 집강소를 설치한 것도 동학 농민 운동이 다(1894.7.6). 전봉준과 전라도 관살사였던 김학진 사이에 합의되 었다. ④ 지역 차별에 반발한 홍경래가 주도하여 봉기한 사건은 홍경래 의 난이다(1811, 순조 11). ⑤ (1889년과 1890년에) 함경도와 황해도에 방곡령이 선포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일본으로의 지나친 곡물 수출 때문이었다. 1 개월 전 예고를 전제로 지방관이 방곡령을 내릴 수 있음은 조선 과 일본이 1883년 7월에 맺은 조일 통상 장정에 규정되어 있었 다.

 

24 – 조선 후기의 모습

정답> ④

'선혜청 당상 민응수가, 지금 돈이 귀해진 것은 공가(公家)에서 거두어 숨겨 두고 부민(富民)들이 쌓아 두어 유통이 되지 않았서 입니다. 만일 관가의 돈을 쌓아 두는 폐단을 없애고 민간의 돈을 유통시키는 효과가 있게 한다면, 전황(錢荒)의 폐단을 구할 수 있 을 것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임금이 말하기 를, 더 주조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으니, 후일 다시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한' 내용이 나와 있다. 이처럼 전황의 폐단이 발 생한 것은 17세기 후반 화폐 유통이 본격화되고 난 후의 일이다 (1678, 숙종 4). 관리가 과전법에 의해 토지의 수조권을 지급받기 시작한 것은 고 려 공양왕 3년인 1391년 직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송상, 만상이 대청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② 왜관에서 개시 무역과 후시 무역이 이루어진 것도 조선 후기 의 일이다. ③ 광산을 전문적으로 경영하는 덕대(德大)가 등장한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⑤ 모내기법의 확대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확산된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25 – 충북 충주

정답> ③ 

답사 계획서'라는 제목하에 주제로 '(가)의 유적과 역사 인물을 찾아서'가 제시되어 있다. 이어 답사 경로로 '고구려비 → →탑평 리 칠층 석탑(중앙탑) → 창동리 마애 여래상 → 탄금대'가 제시 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지역'은 충북 충주임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발생 직후인 1592년 4월 26일~28일 삼도도순변사 신립 (1546~1592)이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왜군에 항전하 다 전사하였다.

오답 해설>

① 직지심체요절이 금속활자로 간행된 곳은 충북 청주이다(1377, 고려 우왕 3). ②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한 곳은 충남 예산이다 (1868, 조선 고종 5). 남연군의 묘가 있었던 정확한 지명은 충남 예산 덕산면 상가리이다. ④ 명 신종의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가 건립된 곳은 충북 괴산이 다(1704, 숙종 30). 정확한 지명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이 다. ⑤ 만적을 비롯한 노비들이 신분 해방을 도모한 곳은 개경(개성) 이다(1198, 고려 신종 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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