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 중종반정
정답> ③
(가)에는 '유자광이 김종직의 문집 가운데서 조의제문을 지적하여 여러 추관(推官)에게 두루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은 다 세조를 지 목한 것이다. 김일손의 죄악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하고, 주석을 달아 왕에게 아뢰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말미암아 연산군 4년(1498)에 발생 한 무오사화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나)에는 '조광조가 아뢰기를, 정국공신은 이미 1년이 지난 오래 된 일이지만 허위가 많았으므로 지금 (이를) 신속히 고치지 않으 면 뒤에는 개정할 수 있는 날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내용이 나 와 있다. 정암 조광조(1482~1519)가 펼친 여러 개혁 정치 중 '위 훈 삭제'와 관련된 것으로, 중종 14년(1519)에 발생한 기묘사화의 주요 빌미가 된 사실이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된 것은 1506년의 일이다. 참고로 중 종은 당시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이었다.
오답 해설>
①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난 것은 명종 2년인 1547년의 일이 다. 당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소윤) 세력이 경기 도 과전의 양제역에 붙여진 벽서를 빌미로 을사사화(1545) 이후 잔존한 반대파 인물들(대윤 세력과 사림계)을 재차 숙청한 사건이 며, 정미사화라고도 한다. 후일 소윤 일파 몰락 후 벽서 사건 자 체가 무고임이 공인되었다. ②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것은 선조 8년인 1575년의 일 이다(동서 붕당). ④ 성삼문 등이 상왕[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된 것은 세조 2년인 1456년의 일이다(사육신 사건). ⑤ (인조반정 후) 공신 책봉에 불만을 품고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인조 2년인 1624년의 일이다(인조반정 이듬해).
22 – 임진왜란
정답> ④
이 무기는 불랑기포라고 하는데, 서양에서 명에 전래되었기 때문 에 이렇게 불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불랑기포는 (가) 당 시 조·명 연합군이 일본군으로부터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기여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조·명 연합군이 일본군과 싸워 평 양성을 탈환한 것은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평양성 전투, 1593.1).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0월 김시민(1554~1592)이 진주성에 서 적군을 크게 물리쳤다(제1차 진주성 전투, 제2차 진주성 전투 는 이듬해인 1593년 6월)
오답 해설>
① 김상용(1561~1637)이 강화도에서 순절한 것은 병자호란 때의 일이다. ② 정봉수(1572~1645)가 용골산성에서 항쟁한 것은 정묘호란 때 의 일이다(1627, 인조 5). ③ 최영(1316~1388)이 홍산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은 고려 우왕 때의 일이다(1376, 고려 우왕 2). 홍산은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이다. ⑤ 이종무(1360~1425)가 (왜)적의 근거지인 쓰시마섬을 정벌한 것은 세종 원년인 1419년의 일이다
23 – 균역법
정답> ⑤
양역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논의한 호포와 결포는 여러 문제 점이 있다고 하니, 그렇다면 군포를 1필로 줄이는 법을 시행하는 것으로 하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경들은 1필로 줄였을 때 생기는 세입 감소분을 채울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군포를 1필로 줄이는 법을 시행하라'는 앞의 말은 곧 영조 26년인 1750년에 시행된 균역법임을 알 수 있다. 균역법 시행으로 말미암아 줄어든 세입을 채우기 위해 결작(1결 당 쌀2두), 해세·어장세·염세·선박세, 선무군관포(부유한 양민에게 선무군관이란 칭호를 주고 1년에 군포 1필)를 징수하였다.
오답 해설>
① 수신전과 휼양전이 폐지된 것은 직전법 시행 때의 일이다 (1466, 세조 12). ② 토지 1결당 미곡 12두를 부과한 것은 대동법 시행 때의 일이 다(1608~1708). ③ 양전 사업을 시행하여 지계를 발급한 것은 대한 제국 때의 일 이다(1899~1904, 광무개혁의 일환으로 시행). ④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전세를 부과한 것(연분9등법)은 공법 시행 때의 일이다(1444, 세종 26). 덧붙여 토지 비옥도를 기준으 로 토지 면적을 6등급으로 나누었다(전분6등법).
24 – 조선 정조
정답> ②
조선 시대 국왕을 알아 맞히는 문제라고 한다. 1단계 힌트에서 5 단계 힌트까지 나와 있다. 1단계 힌트는 '조선의 제22대 국왕'이 라는 점이고[정조(재위 1776-1800)], 2단계 힌트는 초계문신제 시행'이다(1781, 정조 5). 3단계 힌트는 '신해통공 실시'(1791, 정 조 15), 4단계 힌트는 '규장각 설치'이다(1776, 정조 즉위년). 그리고 제시된 선지들 중에서 5단계 힌트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② 수원 화성 건설'이다(1794.2~1796.9).
오답 해설>
① 훈련도감이 설치된 것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인 1593년 (선조 26)이다. ③ 나선 정벌이 단행된 것은 1654년(효종 5)과 1658년(효종 9) 두 차례이다. ④ 간도 관리사가 파견된 것은 1903년(고종 40)의 일이다. 정확 하게는 1902년 6월 이범윤(1856~1940)을 간도 시찰원이라는 명 목으로 파견하였다가 이듬해인 1903년 7월 (북변)간도 관리사로 임명하였다. ⑤ 이인좌(1695~1728)의 난이 발생한 것은 영조 4년인 1728년의 일이다. 소론과 남인 일파(과격파)가 연합해 경종의 죽음에 의혹 이 있고, 영조의 혈통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정권 탈취를 기도한 난이다. 영조를 몰아내고 밀풍군 탄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고 하였다.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25 – 조선 후기의 모습
정답> ④
'경상도 영덕의 오래되고 유력한 가문은 모두 남인이고, 이른바 신향(新鄕)은 서인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 다. 이어 '요즘 서인이 향교를 장악하면서 구향(舊鄕)과 마찰을 빚고 있던 중, 주자의 초상화가 비에 젖자 신향이 주자의 초상화 와 함께 송시열의 초상화도 숨기고 남인이 훔쳐 갔다는 말을 퍼 뜨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향촌 사회에서 신향이 구향과 마찰 을 빚는 내용으로,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신향의 등장으로 말미암 아 신향과 구향 사이에 벌어진 향전(鄕戰)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ㄴ. 중인(여기서는 역관)이 시사(詩社)에서 활발하게 문예 활동을 벌인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ㄹ. 상평통보가 널리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숙종 4년(1678) 이후 의 일이다(조선 후기, 허적과 권대운의 건의).
오답 해설>
ㄱ. 염포(울산)가 개항한 것은 세종 8년인 1426년의 일이다[3포 개항, 부산포(동래)·염포·제포 또는 내이포(웅천, 현재의 진해)]. ㄷ. 시전의 상행위를 감독하는 고려와 조선 초의 관청은 경시서 이다. 조선 세조 12년인 1466년에 평시서로 개칭되었다(갑오개 혁 때 혁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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